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듀크 스나이더 (문단 편집) === [[다저스]] 시절 === 1944년, 만 17세의 듀크 스나이더는 B리그[* 당시 존재하던 마이너리그의 하나]에서 자신보다 평균 6, 7세는 많은 선수들을 상대로 타율 .294 홈런 9개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잠시 더블 A 맛까지 보게 된다. 이후 듀크 스나이더는 징집되어 해군에서 18개월 동안 복무를 하게 됨으로 1945년 시즌을 통으로 날리고, 전역 후 다시 더블 A에서 타율 .250 홈런 5개로 영점을 조정한다. 듀크 스나이더를 다저스로 데려온 [[브랜치 리키]]는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 여겼기에 이듬해 1947년, [[재키 로빈슨]]이 역사적인 데뷔를 한 이틀 후 정식으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를 시켰다[* 듀크 스나이더는 재키 로빈슨과 친하게 지낸 선수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아직 만 20세에 불과했던 듀크 스나이더는 47, 48시즌 통합 5홈런 .243의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고 메이저리그보다는 트리플 A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그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결국 1949시즌 듀크 스나이더는 에베츠 필드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하며 23홈런 92타점 .292의 성적을 거둔다. 이미 앞선 2년 동안 ROY의 자격은 잃었고, 삼진 또한 리그 1위(92개)에 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크 스나이더의 성적은 불과 만 22세의 애송이치고는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1949년의 성적은, 앞으로 있을 10년의 대폭발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1950년, 다저스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완전히 굳힌 듀크 스나이더는 그 해 31홈런 107타점 .321 .379 .553을 시작으로 1950년대를 말 그대로 두들겨 팼는데, 그 10년 동안 그가 거둔 성적은 326홈런 1031타점 .308 .390 .569에 달한다. 홈런왕(1956시즌)과 타점왕(1955시즌)에 오른 시즌은 각각 1시즌에 불과했으나, 그는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 홈런과 타점, 장타율은 1950년대 1위이며, 7시즌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5차례 월드시리즈로 팀을 이끌어[* 총 6차례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으나, 그 중 한 번은 1949시즌이었다.] 그 가운데 2차례 우승을 거두었다. 아쉽게도 MVP는 1955시즌 2위가 가장 높은 성적이었으나 당시 MVP [[로이 캄파넬라]]와는 투표 총점이 5점 차이에 불과했고[* 이 때문에 음모론이 하나 생겼는데, 어떤 필라델피아 출신의 작가가 로이 캄파넬라와 듀크 스나이더의 순위를 서로 반대로 오기하여 투표했다는 설이다. 만약 이 작가의 표가 정상적으로 1위표가 듀크에게, 5위표가 로이에게 갔다면 총점 227-226으로 듀크가 1점차 MVP에 올랐을 것이라는 설인데, 지금에 와서는 모든 투표 용지를 공개하여 단순 음모론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 투표 오류를 일으킨 작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라고. ~~무명의 작가가 MVP 투표가 가능하긴 한가?~~], 모든 성적은 듀크 스나이더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대중들은 듀크 스나이더의 이름과,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가 위치한 뉴욕 브루클린 플랫부시 지역을 빗대 그를 플랫부시 공작이라 지칭할 정도였다. 당시 뉴욕에 위치했던 세 메이저리그 팀 [[뉴욕 양키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브루클린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뉴욕 자이언츠]]는 각각 팀의 얼굴과 같은 중견수를 보유했는데 바로 [[미키 맨틀]]과 듀크 스나이더, 그리고 [[윌리 메이스]]였다. 이 셋은 모두 훗날 각 팀의 영구결번이 되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는데 커리어 전체를 보면 단연 [[윌리 메이스]]가 우세하고, 그 인기는 뉴욕의 아이콘 [[미키 맨틀]]이 가장 앞섰으나 1950년대의 폭발력만큼은 듀크 스나이더가 우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인기는 대단하여 훗날 "Willie, Mickey and Duke"라는 합창 후렴이 나온 히트송까지 나왔다. 다만 멘탈적인 부분은 약한 편이라, [[1951년 내셔널 리그 타이 브레이커|1951시즌 브루클린 다저스가 뉴욕 자이언츠에 1게임 차로 뒤져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실패하자]][* 그 유명한 바비 톰슨의 세상에 울려퍼진 한 방으로 인해 시즌 최종전에 승패가 갈리고 만다. 여담이지만 이 바비 톰슨의 홈런은 사인 훔치기의 결과라는 설이 유력하다.] 구단주에게 직접 트레이드 요청을 하기도 하고[* 프레셔를 견딜 수 없다고 징징거렸다고 한다.], 너무 잔걱정이 많아 25살이 되기도 전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또다른 별명인 실버 폭스는 그런 그의 백발 때문에 생겨난 별명이었다.[* 훗날 다저스에 입단하기도 하는 [[체이스 어틀리]] 또한 백발 때문에 실버 폭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때문에 그의 팀동료들은 그를 울보 혹은 마마보이로 불렀고, 팀의 주장인 [[피 위 리즈]]는 그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듀크 스나이더의 하락세는 1958년, 팀이 브루클린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기며 시작되었다. 본래 브루클린에서 뛸 당시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는 우측 펜스까지의 거리가 불과 90미터 밖에 되지 않았고, 펜스의 높이도 2.4미터의 낮은 높이였다. 좌타자에, 당겨치기 위주의 타격을 구사하던 듀크 스나이더를 위한 홈구장이었던 것. 그런데 1958년, 새롭게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다저스의 새로운 홈구장 메모리얼 콜로세움은 본래 풋볼을 위한 다목적 구장이었던 터라 '''우측 담장까지 거리가 무려 119미터에 달했다.''' 1962년 새롭게 다저스타디움이 개장되었으나, 다저스타디움 역시 역대급 투수 구장이다. 비록 로스앤젤레스가 듀크 스나이더에게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었고, 1959년에는 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월드시리즈 제패를 이루었으나 듀크 스나이더는 제2의 고향과 같았던 브루클린을 사랑했고 뉴욕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5시즌 동안 듀크 스나이더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연평균 100게임에 출장하여 15홈런 53타점 .292 .385 .523의, 이름값에 걸맞지 않는 성적을 남기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